김소월 선생을 그리며


 김소월선생의 시에 대하여---

 김소월선생의 시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와 민요적 율격에 밀착되어 있다.
표면에 그리움, 슬픔, 한(恨) 등 비극적 사랑의 정감이 있으면서도 이면에는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 심층에는 험난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초극(超克)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 참뜻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도 김소월선생의 시는 서구 편향성의 초기 시단 형성 과정에 있어서 한국적인 정감과 가락의 원형질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민족시, 민중시의 소중한 전범(典範)이 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향토성(鄕土性) : 그의 시는 거의가 향토적인 풍물, 자연, 지명을 소재로 삼고 있다.
 (2) 민요풍(民謠風) : 오랜 세월 동안 겨레의 정서 생활의 가락이 되어 온 민요조의 리듬으로 이루어졌다.
 (3) 민족 정서(民族 情緖) : 시의 주제와 심상은 민족의 설움과 한(恨)의 정서를 활용, 민족의 보편적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김소월 선생 학생시절

김소월 선생 문단활동 시절

♣ 김소월선생 약력
김소월 선생은 1902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출생하시었으며 본명은 정식(廷湜)이다. 
1915년 오산학교에 입학였으며, 이곳에서 '시(詩) 스승인 안서(岸曙)김억(金億)선생을 만나게 된다.
김소월 선생은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여, 도쿄상대 재학중 간토 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김소월 선생은 1920년 <창조>에 ‘낭인(浪人)의 봄’ 등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1922년 <학생계>에 ‘진달래꽃’,을 그리고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 밤'등을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동지(同誌) 7월호에는 떠나는 임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우리나라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을 받았다.
그 후에도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하였고, 1924년 '영대지(靈臺誌)' 3호에 ‘산유화’, '밭고랑', '생(生)과 사(死)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1925년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을 발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철도일을 하는 일본인에 의하여 매를 맞아 정신착란으로 장애인이 되어 김소월선생 2세 때 할아버지 밑에서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일본에서 돌아와 할아버지가 하시던 광산 일과 동아일보 지국일이 어려워지자,  1934년12월23일 부인과 함께 술을 취하도록 마셨는데, 이튿날(12월 24일) 음독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시 김소월선생의 나이 33세이고, 문단활동은 5,6년 정도이나 154편의 주옥같은 시와 학술적 가치를 매길 수 없이 훌륭한 시론을 남겼다.

그 이후 김소월선생에 관한 문인과 전문인들의 김소월 선생에 대한 평은 "천재 문인이자 시인"을 일찍이 잃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발표하는 내용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개벽} 19호, 1922.1)

-  금잔디 -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 산천(深深山川)에 붙는 불은

가신 임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 산천에도 금잔디에.

노래 : 조수미, 아주여성합창단, 이현숙

 

- 진달래꽃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정보제공 : newsbank   자료출처 '퐁당퐁당 블로그', 세계동아대백과 사전, 네이버 사이트, 희망의문학